• 완벽한 오해
    2021. 3. 20 – 4. 3
    공간서울, 서울

    이해와 오해의 상호의존성에 대한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서로 다른 감각과 경험을 가진 ‘나, 너, 우리’의 삼각관계에서 이해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은 ‘이해하기 위해 오해하기를 시도한다’는 명제로 발전하여 상극이라 여겼던 단어와 단서 사이에 흐르는 상호의존성을 시각언어로 풀어내는 작업입니다.

    <강물바닷물>
    각 28x33cm, 퍼즐, 2021
    ‘강물’조각은 색칠을 하고 ‘바닷물’ 조각은 종이를 뜯어내어 퍼즐을 완성합니다. 그리고 ‘강물’과 ‘바닷물’의 몇조각을 서로 교환 합니다. 강물과 바닷물의 경계는 ‘물’이라는 하나의 속성과는 무관하게 언어적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퍼즐이 섞여 있 음에도 어렴풋이 ‘강물’과 ‘바닷물’을 읽어낼 수 있음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언어의 세계에서 이쪽과 저쪽의 완벽한 경계는 불가능합니다. 맥락은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에서 의존적으로 발생하고, 뜻은 말하기 방식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래서 의미는 늘 조금 애매하게 다른 단어에 걸쳐진 상태로 있음에도 우리는 그것을 안다고, 이해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완벽하게 오해되기>
    150x50cm, 포스트잇, 2021
    관객은 포스트잇에 동그라미를 하나 그립니다. 자신이 그린 동그라미를 앞서 제시된 동그라미 표본 위에 분류하여 붙입니다. 동그라미 표본은 ‘낯선 동그라미’,’너도 동그라미?’, ‘어제 본 동그라미’ 등 모호한 표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쌓여가는 동그라미는 오해인지 이해인지 알 수 없는 상태, 자기만의 기준대로 분류한 믿음만이 중첩되어 갑니다. 동그라미는 언젠가 완벽한 동그라미에 닿을 수 있을까요?

    <단소와 리코더>
    30x200cm, 트레이싱지 중첩, 악보5피스, 2채널 사운드 반복, 2021
    단소가 연주하는 ‘중임무황태’와 리코더가 연주하는 ‘도레미파솔라시’ 음계를 2채널의 스피커로 분리하고 이를 그린 악보가 있습니다. 단소와 리코더의 음의 높낮이가 같아지는 경우의 수에는 악보의 음표를 겹칩니다. ‘음악’이라는 청각언어와 ‘기호’라는 시각언어를 함께 보여줄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시도한 작업입니다.